조반니 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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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반니 벰보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인물로, 베네치아의 구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는 12세에 갤리선의 선원이 되어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칸디아의 함장, 코르푸와 프리울리의 지방 행정관 등을 역임했다.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고위직을 두루 거쳐 1615년 도제로 선출되었다. 도제 재임 기간 중 오스트리아와의 그라디스카 전쟁을 수행했으며, 스페인의 베네치아 점령 음모에 대응하다가 161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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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벰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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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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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43년 |
사망 | 1618년 3월 16일 |
배우자 | 엘레나 마르첼로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정치 경력 | |
제92대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 | 재임 1615년 12월 2일 ~ 1618년 3월 16일 |
이전 | 마르칸토니오 멤모 |
다음 | 니콜로 도나토 |
2. 생애 초기 (1543년–1615년)
조반니 벰보는 아우구스티네 벰보와 키아라 델 바소의 아들로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벰보 가문은 베네치아의 구 귀족 세력인 '베키에(Vecchie)' 중 하나였다. 벰보의 어머니는 그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겼고, 그는 그 재산을 형제와 나눴다.
벰보는 12세에 갤리선의 선원으로 등록했고, 16년 간 선상 생활을 했다. 그는 레판토 해전 (1571년)에 참전하여 큰 용기를 보여주며 여러 번 부상을 입었다.
레판토 해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벰보는 칸디아의 함장, 코르푸와 프리울리의 프로베디토레(Provveditore, 지방 행정관)를 역임했다. 이후 ''사비오 그란데'', 공작 평의원을 거쳐 1607년에는 산 마르코의 검찰관과 해군 사령관이 되는등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2. 1. 가문 배경
조반니 벰보는 아우구스티네 벰보와 키아라 델 바소의 아들로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벰보 가문은 베네치아의 구 귀족 세력인 '베키에(Vecchie)' 중 하나였다. 벰보의 어머니는 그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겼고, 그는 그 재산을 형제와 나눴다.2. 2. 해군 경력
조반니 벰보는 12세에 갤리선의 선원으로 등록했고, 16년 간 선상 생활을 했다. 그는 레판토 해전 (1571년)에 참전하여 큰 용기를 보여주며 여러 번 부상을 입었다.레판토 해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벰보는 칸디아의 함장, 코르푸와 프리울리의 프로베디토레(Provveditore, 지방 행정관)를 역임했다. 이후 ''사비오 그란데'', 공작 평의원을 거쳐 1607년에는 산 마르코의 검찰관과 해군 사령관이 되는등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3. 도제 재임 (1615년–1618년)
마르칸토니오 멤모가 후임자를 정하지 못하고 1615년 10월 31일에 사망하면서, 베네치아 귀족 사회는 '베키에'라고 불리는 구 귀족 세력과 '누오베'라고 불리는 신흥 귀족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구 귀족 세력은 두 명의 후보를 내세웠고, 신흥 귀족 세력은 단일 후보를 내지 못해 선거가 혼란에 빠졌다. 41명의 투표권자들이 여러 차례 투표를 진행했음에도 선출자를 결정하지 못하자, 베네치아에서 폭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결국 1615년 12월 2일, 타협을 통해 '베키에'파의 온건파였던 벰보가 도제로 선출되었다. 이를 기념하는 화려한 축제가 열렸다.
몇 년간 베네치아는 페르디난트의 보호를 받는 우스코치 해적들로 골치를 앓았다. 도제로서 벰보의 첫 행위는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여 그라디스카 전쟁(우스코크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 전쟁으로 우스코치들은 박멸되었다. 전쟁은 프리울리, 그라디스카디손초, 고리치아, 이스트리아에서 벌어졌다. 프란체스코 에리초가 이끄는 베네치아 군대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그라디스카디손초를 성공적으로 포위하며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그 시점에서 베네치아는 강화를 제안하여, 1617년 9월 27일 파리에서 종전 조약이 체결됐다.
1617년부터 1618년까지 베네치아 주재 스페인 대사 알폰소 데 라 쿠에바는 불화를 조장하여 베네치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스페인 군대를 진격시켜 도시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벰보는 스페인의 베네치아 점령을 저지시키기 위해 의회 소집을 하는등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베네치아에는 첩자가 있던 것으로 믿어지는 스페인은 도시에 오래 머무르며 의회의 행동에 대응할 수 있었다. 불행히도 벰보는 1618년 3월 16일 스페인의 위협으로부터 베네치아를 지키기 위해 싸우던 중 사망했다.
3. 1. 도제 선출 과정
마르칸토니오 멤모가 후임자를 정하지 못하고 1615년 10월 31일에 사망하면서, 베네치아 귀족 사회는 '베키에'라고 불리는 구 귀족 세력과 '누오베'라고 불리는 신흥 귀족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구 귀족 세력은 두 명의 후보를 내세웠고, 신흥 귀족 세력은 단일 후보를 내지 못해 선거가 혼란에 빠졌다. 41명의 투표권자들이 여러 차례 투표를 진행했음에도 선출자를 결정하지 못하자, 베네치아에서 폭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결국 1615년 12월 1일, 타협을 통해 '베키에'파의 온건파였던 벰보가 도제로 선출되었다.3. 2. 그라디스카 전쟁 (우스코크 전쟁)
몇 년간 베네치아는 페르디난트의 보호를 받는 우스코치 해적들로 골치를 앓았다. 도제로서 벰보의 첫 행위는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여 그라디스카 전쟁(우스코크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 전쟁으로 우스코치들은 박멸되었다. 전쟁은 프리울리, 그라디스카디손초, 고리치아, 이스트리아에서 벌어졌다. 프란체스코 에리초가 이끄는 베네치아 군대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그라디스카디손초를 성공적으로 포위하며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그 시점에서 베네치아는 강화를 제안하여, 1617년 9월 27일 파리에서 종전 조약이 체결됐다.3. 3. 스페인의 음모와 벰보의 죽음
1617년부터 1618년까지 베네치아 주재 스페인 대사 알폰소 데 라 쿠에바는 불화를 조장하여 베네치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스페인 군대를 진격시켜 도시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벰보는 스페인의 베네치아 점령을 저지시키기 위해 의회 소집을 하는등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베네치아에는 첩자가 있던 것으로 믿어지는 스페인은 도시에 오래 머무르며 의회의 행동에 대응할 수 있었다. 불행히도 벰보는 1618년 3월 16일 스페인의 위협으로부터 베네치아를 지키기 위해 싸우던 중 사망했다.4.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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